귀농부부의 소박한 삶–적게 벌고 적게 먹고 적게 쓰기 | 이현정

김성균(이하 김) : 귀농인 대상의 인터뷰는 처음이다. 화천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나?
이현정(이하 이) : 2006년에 왔으니 7-8년 됐다. 그전에는 춘천 고성리에서 4년 살았다.

김 : 춘천에 살 때도 귀농한 상태인가?
이 : 그때는 시골집에 작은 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귀농 4년 후 땅을 많이 구해야겠다싶어 땅값이 싼 곳을 찾다가 춘천에서 화천으로 오게 됐다.

김 : 그 전에는 도시에 살았나?
이 : 서울에 살았다.
김 : 귀농의 계기를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
이 : 귀농은 남편이 먼저 결정을 했다. 특별히 말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것은 좋은데 농사지을 자신이 없어 남편이 먼저 시골로 갔다. 남편은 나의 환경실천에 감화를 받아서 결정했는데 저보고 왜 따라오지 않느냐고 하더라.

김 : 남편이 생태적인 삶을 살게 된 계기가 있었나?
이 : 서울에 살 때 연립주택옥상에 고추를 키웠다. 친정엄마의 조언을 듣고 오줌을 퇴비화해서 키웠더니 이웃집 고추보다 잘 자란 것을 보고 재미를 붙였고 귀농의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귀농학교에 다녔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남 화순에 남편 혼자 1-2년 가서 지내다가 춘천으로 갔다.

김 : 그 뒤로 농사지으면서 지냈나?
이 : 저는 직장을 다니면서 도와주는 정도였고 남편은 농사만 짓는다 했는데 수입이 안 되니까 재정이 힘들 때는 도시로 가서 학원 강사도 하면서 지냈다.

김 : 정토회는 어떻게 만났나?
이 : 정토회는 인연이 깊다. 주위 친구들이 정토회를 많이 다녔다.
김 : 그래서 본격적으로 정토회와 인연을 맺은 시점은?
이 : 춘천에 가서 농사를 짓고 출판사에 파트 타임을 할 때쯤 시간이 나서 불교대학을 다녔었다. 그때가 좀 힘든 시기였다. 귀농해서 농사도 잘 안 되고 돈은 없고 집은 불편해서 몸이 아프고 적응하기 힘들었던 시기였다.

김 : 깨달음의 장을 다녀와서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거나 심경적인 변화는 있었나?
이 : 하도 오래전 일이라…. 깨달음의 장에 다녀오고 명상수련도 하면서 수련과정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 당시는 정토회가 생활의 큰 부분이었다. 봉사도 일주일에 몇 번하고 정토회 일을 중요한 부분으로 삼고 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때 남편하고 많이 힘든 시기였다.

김 :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이 : 그때 남편도 같이 공부를 했다. 남편도 깨달음의 장을 다녀왔다.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는데 법문 듣고 공부를 하니까 서서히 극복이 됐다.

김 : 화천에 온 2006년도 이후에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이 : 제가 완전 시골아줌마와 비슷한 강도로 노동을 할 수 있게 됐다.

김 : 주로 어떤 농사를 짓나?
이 : 고추따기, 포장하기, 하루 종일 일꾼들 새참 준비하기 등을 했다. 그렇게 2년을 하니까 지치고 힘들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는 있구나를 확인하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김 : 주로 농사지었던 작물은 어떤 게 있었나?
이 : 꽈리고추, 피망, 애호박들을 농사지었다.

김 : 농사를 짓는 밭 평수가 얼마나 되나?
이 : 2000~3000평 정도 된다. 유기농으로 하니까 약 안치고 풀 베야 하니 손이 많이 간다. 2000평 중 1000평은 나중에 손을 못 대고 놔두게 되더라.

김 : 농산물 어떻게 판매를 했나?
이 : 판로가 제일 어려웠다. 유기농 시장이 좁으니까 진입하기가 어려웠다. 강원도 유기농 단체에 들어가려 했는데 쉽지 않았다. 남편이 한때 방황하고 있을 때는 주위 평판이 안 좋아 진입조차 힘들었다. 화천에 온 이후 2년 동안은 지인에게 팔고 그 후에는 강원유기농 단체에 납품을 했다.

김 : 지금은 어떤가?
이 : 강원 유기농단체에 납품을 할 때는 남편도 저도 일을 많이 했다. 아주 힘들게 할 때는어느 정도 수입은 됐다. 하지만 너무 힘들어 올해는 일을 많이 줄였다.

김 : 농사 이외에는 무엇을 하나?
이 : 저는 한해 한 두 권 번역 편집 일을 한다. 남편은 돈 안 되는 일을 많이 한다. 귀농운동본부 강의도 하고 마을사업 도와주는 사무장 일을 한다.

김 : 속된 말로 농사지으면 돈이 되는지?
이 : 처음 시골에 왔을 때는 ‘안 벌고 안 쓴다’ 주의로 살았다. 그렇게 2-3년을 살았더니 정체되고 기운이 빠지더라. ‘이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하다가 ‘농사지어도 돈이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주의로 바뀌었다.

유기농 농사인데도 허용된 농약을 치면서 열심히 일했더니 도시임금 노동자 초임정도를 벌더라.(둘이 힘들게 일해서) 몇 년 농사를 지어보니 자신감도 생기고 ‘시골 가서도 돈을 벌어야 된다’로 남편의 강의 내용도 바뀌었다. 3년쯤 힘들게 일하니 여기저기 아프더라. 이것도 답이 아닌 것 같다.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고 중간을 찾아보자하고 있다.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김 : 인터뷰 자료집에 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
귀농인 부부. 집 지을 때 수세식변기 없애고 재래식화장실 지어 거름으로 사용/ 농사지어 자급자족(되도록) / 겨울에 에너지 절약을 위해 침실에 한 개만 구들을 넣어 집 짓고, 나머지는 난방한다.
어떻게 자급자족 하는지, 집은 어떻게 지었는지, 화장실은 어떻게 활용하는지 순으로 설명 부탁한다.
이 : 농사짓는 사람이 대부분 밭에서 모든 것을 키워 해결하는데 저는 잘 못한다. 일단 없으면 없는 대로 안 먹고 나오는 것만으로 생활하려 한다. 아직은 저장하는 것을 잘 못하지만 시도해 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호박말리기, 고구마줄기 말리기 등 시골은 농산물 말려서 저장 하는 게 많이 필요하다. 자급자족율은 낮다. 쌀농사도 안하고….겨울에 고구마 먹고 그 정도로 지내고 있다.

최 : 육식은 안하나?
이 : 해마다 새해가 되면 채식주의자가 된다.

김 : 집은 어떻게 지었나?
이 : 집을 잘 지어보자하면서 목수일 하는 지인과 함께 같이 짓기로 했다. 설계도를 대충 그리면 전문가가 보완해주었다. 벽이 손이 많이 갔다. 경량목구조라해서 뼈대를 촘촘히 세우고 손으로 흙을 바르고 그 사이에 왕겨 태운 것을 넣는 식으로 진행했다. 지붕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었다.

김 : 몇 개월 걸렸나?
이 : 벽은 1-2개월쯤 걸린 것 같다. 에너지 효율이 높은 집을 만들자 해서 구들방에는 나무를 때는데 방이 적어 훈훈하다. 그 열이 마루까지 나오고 볕이 잘 들어서 거실에는 난방을 거의 안한다. 가끔씩 기름보일러로 지낸다.

김 : 지난 겨울에 무지 추웠는데 난방을 안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 : 한 드럼 정도 사용한 것 같다. 이십만원 정도 넣으면 한겨울 난다. 너무 추워 바닥에 카페트를 깔아야 지낼 수 있다.

김 : 집이 몇 평인가?
이 : 베란다 빼고 14평이다. 수납공간이 없어서 창고에 물건을 넣는다.

김 : 목공은 누가 했나?
이 : 내가 했다.

김 : 언제 배웠나?
이 : 배운 적은 없다. 집 지을 때 싱크대를 놓으려고 하는데 집이 흙벽인데 번쩍거리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고 방법이 없어 직접 했다. 내가 설계를 하고 흙일 하시는 분이 오셔서 조립을 도와줬다.

김 : 재래식 화장실인데 가득 차면 어떻게 활용을 하나?
이 : 수레에 쌓이니까 이동을 해서 밭에 엎어놨다가 다음해에 퇴비로 사용한다. 원래는 풀을 얹고 켜켜이 올려야 하는데 우리는 그냥 뒀다가 사용한다.

최 : 지금 남편은 무슨 일을 하나? 농사일중 남편 비중이 얼마나 되나?
이 : 마을 일은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 수준이고 주로 농사를 짓는다.

김 : 유기농을 하면 풀뿐만 아니라 거름이 많이 필요할 텐데 어떻게 하나?
이 : 요즘은 구매해서 쓴다. 농사를 많이 지으려면 중국에서 오는 유박(기름 짜고 남은 찌꺼기)이라는 것을 수입해서 사용한다. 요즘은 유기농도 자재가 많이 든다. 생각해 볼 게 많은 것 같다. 대규모로 농사지을 때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결론은 조금 농사짓고, 조금 먹는 수 밖에 없다.

김 : 이제까지 인터뷰하면서 들은 공통된 특징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적게 먹고 적게 쓰자’ 라고 말할 수 있다. 혹자는 이것을 자발적 가난 내지 청빈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이 : 그렇게 살려고 한다. 도시를 떠날 때부터 그런 방식으로 살려고 했다. 너무 적게 쓴다는 것은 돈이 나가는 것을 싫어하게 되니까 마음이 편치 않더라. 그래서 힘껏 벌고 필요 없는 것은 안 쓰는 방향으로 수정을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안 쓰려 했는데 요즘은 부업도 하면서 산다.

최 : 남편분이 귀농하자고 주장을 했는데 시골에 가서 소박하게 살자는 것에 선뜻 동의를 했나? 동의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이 : 소박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를 했다. 하지만 내가 농사짓는 것은 못하겠다고 했다. 갈등이 계속 되었는데 남편이 먼저 결정을 해버리고 나는 결정을 못 내린 상태였다. 그러다가 서서히 결정이 된 것 같다.

최 : 시골 생활 중 무엇이 가장 좋았었나?
이 : 화초나 먹거리를 키우는 게 좋았다. 아침에 농작물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농사일을 하면 머리가 가벼워져서 좋다. 옛날에 정신노동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나 싶다. 여름에 열심히 일하고 맥주 한 잔 마시면 좋고, 노동을 하니 달게 자고, 단순하게 사니 머리와 몸이 가벼워진다. 역시 육체노동이 최고고 농사는 창의적인 일이다. 뭘 어떻게 심을까 고민하는 것도 재미있다.

최 : 낮에는 밭일을 하고 주말이나 저녁시간은 어떻게 보내나?
이 : 주말이 없다. 요일 구분도 없다. 시골은 비오는 날과 비 안 오는 날로 구분한다. 짬 날때는 tv가 없어서 인터넷으로 드라마를 본다. 춘천으로 이사 갔을 때 tv가 안 나와서 tv를 없앴다. 최근에는 드라마를 열심히 본다. 벽에 스크린을 통해서 밀린 영화를 본다.

김 : 정토회가 소비를 미덕으로 하는 이 사회에 대해서 큰 경종을 주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빈그릇운동처럼 일반사람들이 이해하고 접하기는 한계가 있다. 귀농해 생활하면서 소비가 세상 최고의 미덕이라고 하는 사회에 대해서 생각도 많이 하게 될텐데….. 올바르게 바로 잡아야 될 방향을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 : 환경이나 정토회 스님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알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최 : 매주 수요일 날 법회에 가나?
이 : 예전에는 3년 동안 집에서 법회를 열었다. 이제는 춘천센타에서 진행한다.

최 : 춘천센타에서 활동을 하는가?
이 : 예전에는 활동을 했었는데 이제는 안한다.

김 : 지금은 책도 만든다고 하는데 주로 어떤 책을 하는가?
이 : 예전에는 어린이 책을 주로 했고 최근에는 실용서적을 한다. 최근에 번역한 책은 ‘텃밭농부를 위한 미생물 먹이그물 활용법’이라는 책을 번역했다.

김 : 방과 구들을 직접 보면서 자세하게 설명 들었으면 좋겠다.
이 : 방은 나무를 덜 때고 따뜻하게 하려고 작게 만들었다. 방의 바닥은 광목에 염색을 하고 기름과 콩을 발랐다. 욕실은 변기가 없는 점만 특이하고…바닥은 나무로 만들었다.

김 : 집안의 특징이 벽에 달린 것이 별로 없다.
이 : 흙벽이라 못을 박을 수 없다. 못을 박으려면 집 지을 때 나무를 덧대야 한다. 시계를 달려 해도 천장에서 매달아야 한다. 농사짓고 싶은 사람들의 기거를 위해 집을 한 칸 더 만들었다. 자주 이용해도 되고, MT도 환영이다.

김 : 이제까지 인터뷰에 응해 줘서 감사하다.

# 에코붓다 소식지 2014년 1-2월 호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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