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공동체와 계획공동체

2007.07.24 15:53:34

김성균

 계획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동경

생태공동체를 “더불어 사는 삶과 그 삶의 터전” 이라고 이해 할 때 계획공동체라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계획공동체는 영어로 Intentional Community 혹은 Planned Community로 표현한다. 이 단어가 갖는 의미는 일정한 신념을 공유하고 의지하면서 일정한 정주체계를 지니고 있는 공동체로 이해된다.

인류는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이성의 지배되지 않는 사회, 감성이 우선하는 사회를 끝없이 추구해 왔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일정 부분을 차지해왔다. 사회의 한 틈을 꾸준히 차지 해온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사회적 공공선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과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야 할 생활의 실천을 꾸준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계획공동체의 생성과 쇠퇴

산업사회 이전에는 전통 수도원과 아쉬람 등의 기독교 수도원인 베네딕도, 프란체스코 수도원, 예수회 등이 공동체적 관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620년에 Plymourh Pilgrims에 의해 시작된 미국의 Coty on the Hill, 1663년 Delaware, 1683년에 Labadie 등이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지속해 나갔다. 그리고 산업사회 이후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지국 전역에 공동체가 급속하게 확사되게 된다. 특히 사회의 새로운 창조를 위해 유토피아 운동이 공동체 운동을 급속도로 확산시켰다. 유토피아 운동에 근거한 공동체 운동은 산업화와 비인도주의와 부정의에 대한 삶의 새로운 반성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로버트 오웬이 시작한 스코트랜드의 뉴라나크 방직공장의 생산공동체, 그가 미국에 설립한 뉴하모니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1787년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쉐이커 공동체, 1703년에서 1904년까지 지속된 하모니화, 캐나다에서 발생하여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후터파 공동체, 드호볼파 공동체, 1843년에서 1933년까지 지속된 어메니티 공동체, 1817년에서 1898년까지 지속된 조아공동체, 1848년에서 시작되어 1881년까지 있었던 오나이더 공동체,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1854년부터 1896년까지 진행된 카톨릭 공동체인 성 내지언즈 공동체, 미국 미주리주와 오레거주에 1844년부터 1896년까지 진행된 베델과 오로라 공동체 이외에 야마기시회실현지, 방주공동체, 리버사이드 공동체 등 지금도 상당히 많은 수의 공동체들이 소멸과 생성을 반복되고 있다. 그 외에도 1960년대 반문화운동 형태로 출현한 히피운동 등이 공동체 운동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향약, 두레, 계와 같은 형태의 전통적이고 자연부락 형태의 공동체가 있었지만, 한국의 근대 이후에 형성된 공동체는 외부적인 요인, 가령 그대화, 재개발 등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계획공동체가 두레마을, 산안마을과 같은 곳이다.
이러한 계획공동체는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거치며서 하회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계획공동체의 이념과 실천, 그리고 사회적 메세지

계획공동체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공동재산, 공동분배, 공동소비, 고동생활을 전제로 한다. 개인에 대한 비중이 공동체 내부에서도 중요한 의제로 제기되면서 최근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비평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우리사회에서 한 번 정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 생활이 ‘나눔’을 바탕으로 진행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회적 메시지를 생활 속에서 끝없이 제시되고 있다.

공동체 식구들간의 수많은 이야기와 토론을 통하여 집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유지시켜나간다. 그 의사결정과정은 대의민주주의체제가 지니고 있는 일반사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의사결정방식이 아닌 소수의 의견도 다수의 의견만큼 비중이 있다고 인식하면서 진행하는 합의제 방식은 이란사회에서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리고 계획공동체의 의사결정이 대면관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산안마을은 연찬이라는 기제를 통하여 서로 마음나누기를 하고 다듬어 가듯이, 두레마을이 말씀과 노동학교를 통하여 상대와의 호흡맞추기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듯이, 그리고 영국 스코트랜드의 핀드혼에서 대지와 자연과의 호흡을 통하여 통합적 사고를 만들어 가듯이 계획공동체에서의 의사결정은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중요한 과제이며 서로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계획공동체가 종교적 색채가 있거나 특정이념에 근거하고 있더라도 이들은 사회적 공동선을 위한 선의의 합의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는 점은 일반사회에서 분명하게 주지하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사결정체계는 단순히 의사결정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나눔이 구성원 간의 나눔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를 갖는다.

초검절약적인 생활, 자연을 대하는 생산방식, 기술운영의 적용 등은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군 구문천리에 있는 산안마을의 빨래하는 과정은 거의 경의로울 정도이다. 이들은 빨래를 하는 과정에서 수도꼭지로 부터 나온 물이 6번의 재활용과정을 거쳐 진행된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법을 몸으로 이행하는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몸에 익힌 철학은 생산과정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유기농업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기가 흐르는 농업생산이 땅, 터와 삶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고 땅을 대하여야 할 자세, 자신이 호흡하는 터를 대하는 자세, 그리고 땅과 터에 이루어내는 삶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생산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한다. 그리고 땅과 관꼐를 위해 ‘노동의 땀’이 강조된다. 노동을 통하여 대지와 생명이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나눔의 미학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타지와의 관계는 아이와 여성, 노인등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그들의 호흡, 그들의 숨결, 그들의 이야기를 그냥 흘러 보내지 않는다. 이러한 미세한 관찰은 아이들의 삶을 스스로 생각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르는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제공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눔에 대한 미덕을 제공한다.

계획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스펙트럼들은 자본친화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이고 몰질지향적이 사회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강한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는 나눔, 작은 것, 그리고 관계 등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원적인 생활과 낭만적인 생각에 젖어 가끔씩 들러보는 계획공동체의 겉모습을 보면서 한 번쯤 살고 싶은 동경의 대상으로 흔히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관계의 어려움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일단 내 주변에 있는 식구들과의 의사소통을 생각해보자. 가족간의 의사소통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동체 구성원들은 최소한 몇 십명 단위이다. 과계의 형성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계획공동체는 타자와의 관계의 문제를 제시하는 좋은 사례이다. 그것은 주변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공동체 의식의 광역적 확장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계획공동체에서 사용되고 있는”의도적이다. 계획적이다”라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공공선을 이루는 방법, 나눔의 미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식지 2004년 11,12월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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