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위하는 길은 다른 생명에 대한 이해로부터

지금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볼까요? 맑은 물을 지금 우리가 오염시켜 놓고는 집집마다 정수기를 달아놓고 삽니다. 맑은 공기를 오염시켜 놓고는 집집마다 공기 청정기를 달아놓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이런 게 너무 많습니다. 그럼 앞으로 오존층이 파괴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태양광선이 피부에 닿을 때 자외선에 의해서 피부암이 발생합니다. 이걸 막으려면 우주복을 입고 다녀야 합니다. 우주복이 얼마나 가볍고 부드러운가, 어쩌면 평생 돈 벌어서 이 우주복 사는 게 꿈인 삶이 될 수도 있어요.

공기청정기 달아놓고 우주복 입고 외출하고, 그거 못해서 부러워하고. 이게 발전이고 잘 사는 삶일까요? 잘 산다고 한 것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거꾸로 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자연조건에서 생명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생명들에게는 이런 자연조건이 가장 좋은 거예요. 이 자연조건에서 살 수 있는 생명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조건이 바뀌면 이런 조건에서 살던 생명들은 종이 소멸하고 새로운 조건에서 사는 생명들이 살게 되겠죠. 나쁜 건 아니예요. 그러나 현재 살고 있는 인간이 가장 큰 재앙을 받을 조건이 되었다. 그런데서 참으로 인간을 위한다면 인간 이외에 눈을 뜨고 그 생명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부부 지간에도 진정으로 나의 이익은 아내를 또는 남편을 이해하고, 그의 이익을 함께 해 나갈 때 진짜 내 이익이 되어나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를 위하고, 인간을 위한다는 것은 제 손으로 제 발등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물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 자기를 위하는 길, 우리 후손을 위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살아가는 다른 생명에 대한 이해 그리고 지금뿐만 아니라 미래 후손들에 대한 이해를 함께 해나가야 합니다. 나를 희생해서 돕는 게 아니라 이것이 진정으로 내 이익을 올바르게 취하는 길입니다. 바로 우리 존재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서로 연관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때 이걸 한마디로 얘기하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달았냐?’ 바로 우리의 존재가 연기적 존재 즉 서로 연관된 존재라는 것을 봤다. 깨쳤다. 눈을 뜨니까 이웃이 있다는 것, 나와 이웃이 분리될 수가 없다는 것. 좁은 구멍으로 볼 때는 다섯 손가락이 다 따로따로 존재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까 한 손에 다섯 손가락이예요. 이것은 하나도 아니고 다섯도 아니예요.

그래서 하나도 아니고 다도 아니다. 다가 곧 하나고 하나가 곧 다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일즉일체 다즉일 입니다. 개별적 존재의 무수한 집합 모임이다. 이게 사회다 라고 봤기 때문에 인간사회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자연환경에서는 ‘적자생존’ ‘약육강식’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어느 한 쪽 면만을 본 편견입니다.

연관 고리의 개개를 보면 여러 개의 모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떨어진 개개의 집합이 아니라 연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존재의 본질을 연기라고 합니다. 그것을 네 개의 문장으로 표현할 때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서로 연기되어 있다. 우리 몸도 수많은 세포로 연기되어 있고 그것은 또 분자들로 원자들로 소립자로 연기되어 있다. 옆으로도 연기되어 있고 속으로도 연기되어 있다. 이것이 존재의 본질이다. 딱 떼어내서 단독의 존재는 없어요. 물질의 근본 알갱이는 옛날에는 물이다 공기이다 이러다가 근대에는 원자다, 그러나 그 원자도 실은 더 작은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립자에 대한 것이 양자역학 아닙니까? 원자는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되어 있고 또 그걸 연결해주는 중성자가 있고, 이런 핵은 쿼크로 구성되어 있다. 쿼크가 결합을 세 개 이상 하면 물질적 존재인 알갱이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가 아닌 거예요. 존재의 핵심은 결합이예요. 아무리 커져도 존재의 핵심은 결합이예요.

연기법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신 겁니다. 깨달음의 핵심은 과학으로 연구되어져도 오류 모순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치를 가르친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물을 보는 관점, 이걸 세계관이라 그래요. 우리는 연기적 세계관을 갖는다. 연기적 세계관을 가져야 여기에 눈이 떠져야 인간과 자연 즉 자연 환경 파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고, 이 연기적 세계관을 가져야 인간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고, 이 연기적 세계관을 가져야 인간의 정신문제의 오류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재앙 3가지가 자연환경 파괴, 공동체 파괴, 인간성 상실입니다. 이걸 해결하는 길은 눈 뜬 자가 본 관점을 유지해줘야 합니다. 그게 연기적 세계관이지요.

# 에코붓다 소식지 2013년 7월,8월 호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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