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환경

 

불교와 환경


인간과 동물의 생명이 다르거나 혹은 같다는 상想

법륜|에코붓다 이사장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면 바이러스의 생명도 소중한 것일까?
불살생不殺生을 오계의 첫 번째로 삼고 있으며, 만물의 평등을 주장하고 있는 불교의 관점에서 이를 어떻게 봐야할까?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데는 물과 공기, 햇빛, 흙 등이 있어야 한다. 나무는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산소를 배출해 공기를 맑게 한다. 또 가랑잎을 떨어뜨려 땅을 기름지게 한다. 여기서 나무와 물, 공기와 햇빛, 흙 등은 단순히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연결된 존재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른 동물과 같은가 하면 다르고, 다른가 하면 같은, 연관된 존재이다. 인간의 생명이 다른 동물보다 소중하다거나 혹은 서로 평등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인간의 관점에 불과한 분별이다.
 
더 잘살겠다고, 더 많이 갖겠다고

지구상에 모든 존재들은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이라면 풀이라도 뜯어 먹어야 하고, 토끼라도 잡아야 한다. 제 3세계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나무를 베는 일 역시 삼림을 파괴한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부족함을 채우고 생존하려는 것은 자연계의 본능이다. 문제는 더 잘살겠다는 더 많이 갖겠다는 인간의 탐욕이다. 그 어떤 동물도 당장의 배고픔 이상을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리 용맹한 사자라도 먹을 것이 쌓여있어도 배가 부르면 주변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이 다른 동물의 그것보다 더 소중하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편하고 더 잘 살기 위해 나무를 베고 땅을 파고 빌딩을 짓고 공장을 세웠다. 그 결과 홍수가 나고 공기와 흙, 물이 오염되어 생존위기에 몰렸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환경윤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뭇 생명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인류 자신을 위해서이다.

인간과 동물이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무엇이 무엇보다 못하다거나 낫다거나 하는 논쟁은 그래서 소모적이다. 손과 발처럼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분리되고 개별적인 존재라는 착각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손이 불편하다고 더러운 발을 잘라버리겠는가. 결국, 고통은 나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나我와 내가 아닌 것

어디서부터가 생물이고, 무생물인가. 생태계에는 그 경계를 분류할 수 없는 존재가 많이 있다.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유글레나는 동물과 식물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생물이란 것이 오랜 시간을 거쳐 변화해온 것이기 때문에 딱 잘라 여기까지는 생물, 여기까지는 무생물이라 나눌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간과 다른 동물도 그렇다. 우리 눈으로 보면 고릴라와 침팬지가 같은 것 같지만, 유전학적으로 보면 사람과 침팬지가 오히려 더 비슷하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디까지를 생명이라고 하고 어디까지를 생명이 아니라고 나눌 수 있을까?
어디까지 나我라고 하고 어디까지를 내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만물은 상호연관되어 존재한다. 수많은 사람과 만물의 노고가 함께 하지 않으면 옷 한 벌도 지금 여기 존재할 수 없다. 그 이치를 모르고 많은 사람은 욕심과 생각을 자기로 삼고, 다른 생명을 괴롭히며 자연을 파괴한다. 결국, 그 괴로움은 고스란히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누구나 내 가족과는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와 형제, 내 아이의 고통은 쉽게 느낄 수 있다. 감수성이 더 발달한 사람이라면 인종과 민족 간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생명에 대해서는? 어쩌면 모든 생명의 고통까지 느끼는 것은 심오한 감수성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환경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관점에서는 뭇 생명들이 인간과 같다거나 다르다는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한 소모적인 논쟁 대신 인간의 정신성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풀어야 한다.


생명과 생명 아닌 것,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넘어설 때 환경문제를 바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여타 동물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갖고 있다. 하나는 자신이 생존하는 데 별 지장을 주지 않는데도 다른 생명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반대로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다른 생명을 살리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보통 여타 생물들은 자신의 생존에 지장이 없으면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는다.

종교나 한 국가의 이익 떄문에 벌어지는 전쟁, 탐욕이나 이기심이 일으키는 경쟁 등은 전자에 해당하는 정신세계이다. 이는 인간의 욕망이고 자연계의 본성이라고 일컬어지나 실은 서구사상을 가치체계로 한 자본주의적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존재의 상호연관성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일어난 행동의 결과일 뿐 인간의 본성도, 자연 세계의 법칙도 아니다.

환경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인간이 본래 갖고 있던 선한 본성을 회복하고 잘못된 행동 양식을 걷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또한, 생명과 생명 아닌 것,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넘어 모두 연결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에코붓다 소식지 2022년 03·04월호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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