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밀양 가을농촌활동을 다녀와서 | 최지선

지속 가능한 삶
10월 밀양 가을농촌활동을 다녀와서
최지선 | 평화재단 청년포럼 회원

지난 10월 19~20일 “새로운 백년을 열어가는 현장탐방프로젝트” 에 참가해서 밀양에 가을농활을 다녀왔습니다. 밀양은 765Kv 송전탑 건설 예정지이고, 지난 8년 동안 한국전력과 주민들의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다녀온 밀양은 친근했습니다. 여전히 아름다웠고, 그래서 경찰과 주민들의 싸움이 더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처음 밀양에 간 것은 지난 8월 현장탐방프로젝트 답사 차 보라마을에 갔을 때였습니다. 도시에서 자란 저는 처음으로 TV에서만 보던 “마을회관”에 가서 “이장님”을 만난 것이 신기했습니다. 저는 현장탐방 얘기를 하러 왔지만 이장님은 알아듣기 어려운 밀양 사투리로 다짜고짜 제게 성이 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제가 “최씨 입니다” 라고 말하자 자기 성을 말 할 땐 “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의미에서 “가”를 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저한테 성이 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최씨… 아니 최’가’ 입니다.” 라고 제가 힘 줘서 대답하니 뿌듯해하시면서 항상 그렇게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장님의 지적이 싫지 않았습니다. 이장님은 뻥튀기를 큰 스텐리스 사발에 담아 주셨고, 다방커피를 주셨습니다.

8월 현장탐방 때 보라마을회관에서 1박 2일을 지내면서 송전탑 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어르신들과 신나게 춤판을 벌이고, 어르신들께 닭죽을 만들어 드리고, 어설프게나마 농사일을 도와드렸습니다. 보라마을을 떠날 때, 우릴 배웅하시며 손을 흔들고 계시는 어른들을 보며 저는 울었습니다. 수도권에 전기를 보낸다는 명분 아래 송전탑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제가 바로 그 전기 사용자였습니다. 또 탈핵과 공권력의 폭력과도 관련 있는 싸움을 밀양 어르신들이 대신 짊어지고 계신 것 같아서 더 죄송했습니다. “우린 보상을 원치 않는다” 라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은 왜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왜 삶의 터전을 떠나도록 강요되는 것일까요? 명분 없는 송전탑은 왜 지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9월 29일 밀양에서 한국전력의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에 다시 갔습니다. 어르신들은 매일같이 농성장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농성장을 지키고, 뺐기고, 한전 직원과 싸우고, 경찰에게 체포되고… 밀양은 마치 전쟁터 같았습니다. 한 어르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좋은 가을에…이 뭐하는 기고…여름에 땡볕에서 땀 흘려 일한 거 추수해야 카는데, 이 뭐하는 기고.”

10월에 현장탐방으로 다시 방문했을 때도 한전에서는 여전히 밀어붙이기식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어르신들은 밭이 아닌 농성장에 다니셔야 했습니다. 현장탐방프로젝트에 참여한 40여 명의 청년과 시민사회 활동가들과 함께 가을 추수를 도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함께 못하시는 분들이 200만원도 넘게 지원해 주시고, 어르신들 추위 이기는 한약도 지원해 주셔서 밀양 가는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밀양의 논밭은 황금빛이었고 논둑에는 갈대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감을 따 봤는데, 일도 재밌고, 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배우고, 홍시도 왕창 먹었습니다. 우리는 몇 개밭에 나뉘어서 일을 했는데, 첫 날 일한 밭에서는 농활단이 3일치 일을 했다고 아저씨께서 좋아하셨고, 둘째 날 일한 감 밭에서 할매는 “농사 재밌지?”라고 하시며, 농사일은 고되지만 재미도 있고, 돈 버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하셨습니다. 농성장에서 볼 때와는 다른 밀양 주민들의 모습을 만나 반가웠습니다.

첫째 날 밤에 매주 토요일 밀양에서 열리는 ‘할매, 할배가 간다’ 문화제에 갔습니다. “질긴 놈이 이기는 것이지요” 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는 할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연행된 녹색연합 활동가의 부인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대안학교에서 온 중고등학생들이 율동도 하고 타악기 공연도 해서 저희 농활단도 어르신들과 신명나게 춤판을 벌였습니다.

밤늦게는 밀양 대책위원회 이계삼사무국장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밀양 상황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현재 밀양에는 59기의 765Kv급 송전탑 건설이 예정되어 있고, 문제가 너무나도 많은 송전탑 건설 사업이라는 걸 강조하셨습니다.

송전탑 자체의 소음피해, 전자파피해가 심각할 뿐만 아니라 밀양을 지나는 송전선로는 권력자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지름길인 산길을 피해 굳이 인가가 많은 밀양으로 우회해서 지나간다고 하셨습니다.

밀양송전탑은 신고리에 건설되고 있는 원전에서 오는 전기의 송전을 위한 것인데, 얼마 전 원전 주요부품이 부실부품으로 판명돼서 공사가 몇 년 동안 지연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렇게 급하게 공사가 강행될 필요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른들의 호소 편지도 보여주셨습니다. 삐뚤 빼뚤 눌러 쓴 할매들의 편지에는 초록으로 꽉 찬 밀양, 시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손들에게 물려줄 밀양을 지키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서울에 돌아오면서 울지 않았습니다. 물론 계속 함께하지 못하는 게 죄송스럽고 밀양의 상황이 여전히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이계삼 사무국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어르신들께서 보여주신 진정성, 삶에 대한 열정은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시위 한번 해 보지 않은 제가 희망버스를 타고 가서 스크럼을 짜고, 고소하겠다는 심장 쫄깃한 한전 직원의 협박까지 들었습니다.

에너지문제, 탈핵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파트 13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립니다. 전기밥통 코드를 뽑아놔서 언니에게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밤에 스탠드 등 대신 촛불을 켭니다. 지하철에서도 되도록이면 에스컬레이터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고, 버스나 지하철 대신 자전거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어디선가 들었습니다. 설령 밀양에 송전탑이 들어서고 신고리 원전이 들어선다고 해도 밀양 어르신들은 이미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셨고 이긴 싸움을 하신 것이라고. 저의 작은 변화도 그 증거가 될 것이고, 밀양을 만나고 변화한 사람은 저 하나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에코붓다 소식지 2013년 11-12월 호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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