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환경

 

불교와 환경

불교와 환경윤리

법륜|에코붓다 이사장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인간은 스스로 변화하여야 한다. 진정한 깨달음은 자기 고뇌를 해결하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깨달음을 이룬다면 전 인류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안목이 열릴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 갈등과 분쟁, 환경파괴 등 모든 문제는 자기 자신, 자기 가족, 자기만족만 생각하는 개체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부 사이의 갈등이 자신의 욕구를 상대에게 강요해서 발생하는 것처럼, 환경문제 역시 인간의 편의와 입장만을 생각한 결과이다. 인간은 자연과 연결된 존재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군림하면서 이를 망각했다. 그 고통은 우리 미래 세대가 고스란히 겪게 될 것이다. 뿌리를 뽑힌 이파리가 당장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드는 그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환경파괴를 일삼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지구에서 없어져야 할까? 그렇지 않다. 1000평의 땅에 풀만 자라게 할 때와 그 풀밭에 소를 한 마리 키울 때, 어느 곳에서 풀이 더 잘 자랄까? 물론 소가 있을 때이다. 마찬가지로 자연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다른 생명과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문제는 자연의 재생능력을 벗어날 정도의 소비라든가, 인간 중심의 잘못된 사고이다.

인류가 소비하는 물건 대부분은 썩지 않고,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죽지 않고, 늙지 않겠다는 욕망은 썩지 않고 분해되지 않는 쓰레기를 만들어냈다. 오래도록, 가능하면 영원히 사용하려는 욕심이다. 쓰레기가 올바로 처리되려면 자연 상태로 분해되어야 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듯 이제는 ‘썩는 것이 아름답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연계에서는 본래 쓰레기란 없다. 버릴 것도 없고, 불필요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벽돌이 방에 있으면 쓰레기이지만 공사장에 있으면 훌륭한 건축자재가 되는 것처럼, 어떤 존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사용되어야 할 곳에 쓰이지 않으면 쓰레기가 된다.
지금의 쓰레기 처리는 단지 일정 지역에 모아 쌓아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쓰레기를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그저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깨달음, 환경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

환경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더러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이를 해결할 수도 있다고 믿지만, 위기의 순간을 미루는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다.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패를 막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해도 이는 눈앞의 이익만을 본 것이다. 개별적 문제,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더 큰 문제를 불러온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가치관, 관념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고, 쓰레기를 줄이자는 생활습관의 개선을 촉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깨달음이 필요하다.
자기중심적인 관념을 벗어나야 한다. 모든 존재의 연관 관계를 확연히 깨닫는다면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다. 이 의자가 무엇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이것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공덕이 들어갔는지 분명히 인식한다면 어느 것 하나 대충 다룰 수 없고 쉽게 버릴 수 없다. 책상이든 의자 든, 음식이든 옷이든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고맙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 사고의 전환은 바로 삶의 변화로 나타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는 그 사회의 가치관과 생활양식도 바꾸어 놓는다. 잘 먹고 편리하게 사는 것이 어떤 문명의 시각에서 보면 풍요를 누리며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발 물러서서 깨달음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인간은 스스로 변화하여야 한다. 진정한 깨달음은 자기 고뇌를 해결하고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깨달음을 이룬다면 인류의 문제를 나의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안목이 열릴 것이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깨달음이 필요한 시기이다.


중중무진연기,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어

뜰의 나무가 만들어 낸 산소를 마시며 나는 숨을 쉰다. 그리고 그 앞에 흐르는 샘물을 마시고 살아간다. 내 몸의 70%는 그런 물이다. 또 땅에서 만들어진 채소와 음식을 먹고 살아가며, 그 채소는 비와 바람, 태양과 땅속의 작은 벌레, 똥과 나무 썩은 것 등 많은 것의 힘을 받고 살고 있다. 그것을 다시 내가 먹음으로써 살아가며, 죽어서는 다시 그 땅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중중첩첩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중중무진연기이다.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아즉일 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 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즉일념 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 一念卽是無量劫

하나 가운데 일체 있고 많은 가운데 하나 있는지라,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은 것이 곧 하나일세,
하나의 티끌 안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일체의 티끌 무더기도 또한 이와 같네.
영겁의 시간이 한 순간이요,
한순간이 곧 영겁의 시간이라.

– 의상대사의 <법성게> 중에서


*에코붓다 소식지 2021년 11·12월호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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