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블로그] 불교가 가꾸어야할 공동체 세상

방송날짜: 2007.7.18

얼마 전 동국대 에코 포럼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제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3년째 전국을 걸어서 탁발 순례 중인 도법 스님이 발제하고, 유정길 에코붓다 대표와 의 황대권씨, 양재성 기독교환경연대 대표 등과 함께 발표했습니다.

지금까지 주로 `개인 해탈’, 즉 개인 구원에 머문 불교가 어떻게 공동체 세상을 가꾸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제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깨침의 종교다. 무엇을 깨달을까. 신언서판(身言書判)이 그럴 듯한 사람 뿐만 아니라 못 나 보이는 사람이나 미물까지도 모두 부처라는 것이다. 또한 죽어서 가는 세계가 아닌 깨침의 세계, 즉 깨치고 보면 지금 여기가 바로 극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대각한 지 2500년이 지났지만, 불교는 그 대각과 전법의 목적에 이르지 못하고, 여전히 전정각산의 고행굴 속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여전히 깨침을 위한 수단으로서 불교는 보이지만, 붓다의 깨달음으로 열린 세상의 모습은 요원하기만 하다.

나도 어느 한 순간에 세상에서 가슴 아픈 뉴스가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붓다가 설파한 것도 그런 종말론적 세계관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안목과 관점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불교에서 중시하는 ‘개인 수행’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도 않는다. 도법 스님이 언급한 대로 생명은 어느 것이나 할 것 없이 공동체로서 태어나고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생명의 위치에선 ‘절대적으로 홀로’인 존재이기도 하다. 개인의 결정에 의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결국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누구도 대신해줄 수도 함께 해줄 수도 없다. 갈등하며 살 것이냐, 조화롭게 살 것이냐를 결정짓는 관점과 삶도 개인의 변화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일심이 청정하면 온 국토가 청정하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붓다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정해지는 수단이 개인 수행에만 있지는 않다. 오히려 혼자서는 어찌 해보기 어려운 업보도 좋은 도반들 사이에서, 또는 가족들의 사랑 속에서, 좋은 모임이나 공동체에서 함께 사랑받고 사랑하는 동안 상처가 용해되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일이 많다. 그것이 공동체가 가져다주는 축복이고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의 하나인 ‘상처의 치유’ 측면으로 보더라도, 개인 수행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공동체적 삶인 것이다.

또 더욱 더 심화된 수행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두 명 세 명… 열명이 모여 한 서원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자극이 되고, 보충이 되고, 힘이 되어 단순히 숫자의 합보다 훨씬 더 나은 효과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도반이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수행의 전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불교는 지금까지 상당 부분 승가만의 불교였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초기엔 스스로 자신의 빛을 감춘 채 화광동진(和光同塵)해 민초들과 어울린 원효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왕사와 고승들은 주로 왕족과 귀족의 벗이었고, ‘우리들의 선우’는 아니었다.

귀족화한 고려의 불교는 조선 500년 동안 스님들이 도성 출입도 못하고 종과 다름 없이 천대받는 업보를 낳았다. 20세기 들어 불교가 다시 세속적 힘을 얻고, 한국에서 신자 수 1위의 종교로 떠올랐지만, 불교는 여전히 개인적 수행의 종교로 남아 있을 뿐, 사회 공동체의 책임을 다하는 종교로 기능은 미약하기만하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도심에 많았던 사찰은 조선 시대 대부분 산사로 들어갔다. 농경사회였던 만큼 산사는 농촌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 했다. 상당수 절들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하촌과 관계도 공동체라기보다는 지주와 소작의 관계였다.

스님들 가운데는 근대 전남 장성 백양사의 중창주 만암 스님이나 충남 예산 수덕사의 벽초 스님처럼 굶주리는 사하촌 사람들을 위해 매년 춘궁기 때가 되면 보를 터서 보막이 공사를 시켜 노임을 줘서 일체가 된 분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찰은 이렇게 마을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보다는 때때로 가서 복을 빌고, 재를 지내는 ‘전문적 종교 영역’에만 머물렀다.

그래서 실상사와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해가는 공동체운동은 2500년 지속해온 불교의 껍질을 깨는 일이며, 불교가 세상에 온 목적을 제대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비록 불교도는 아니었지만 인도 땅에 다시 온 붓다로 여겨지는 간디가 영국 유학 중 인도 정신에 대해 깨친 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도 공동체운동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톨스토이공동체를 실험했던 간디는 인도에 귀국한 뒤에도 늘 공동체에서 살았다. 그는 한번도 개인적으로 삶을 살지 않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살았다.

인도 중부 세바그람 공동체에서 말년에 14년을 산 간디는 그 공동체를 중심으로 마을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간디가 공동체 내부에 중점을 두었다면,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처음부터 실상사가 있는 산내면 전체와 또는 이 땅 전체를 우리가 함께 해야 할 공동체로 보며 일을 해감으로서 진일보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인도보다 더욱 암울한 시절 간디와 동시대에 공동체를 꿈꾼 선구자들이 있었다. 이미 경술국치 전에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 선생은 이미 1899년 평북 정주 용동에 일가친척을 이주시켜 이상촌인 용동촌을 건설했다. 그리고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김약연 선생을 중심으로 명동촌을 건설해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민족 독립과 이상을 실현할 꿈을 키웠다. 용동촌과 명동촌은 초기 민족주의적 기독교 선구자들에 의해 세워진 이상촌들이다. 정주 오산학교와 용동촌에선 신채호, 조만식, 이광수, 유영모, 벽초 홍명희, 함석헌, 한경직, 김억, 김소월, 이중섭, 풀무농업학교 창립자 이찬갑 등이 선생과 학생으로 민족 공동체적 이상을 싹틔웠고, 명동촌에선 김재준, 문익환, 안병무, 윤동주, 강원용 등을 키웠다.

남감 이승훈과 함석헌의 맥은 충남 홍성에 풀무농업학교를 설립한 이찬갑으로 이어졌다. 이찬갑이 풀무학교를 설립한 지 3년 만에 연탄가스로 눕게 된 1960년부터 홍순명 선생 등이 지금껏 풀무농업학교를 이끌어왔다. 급격한 산업화로 이농이 늘면서 농업학교는 ‘똥통학교’라고 천시 당해 한 해 입학생이 두세 명에 불과한 때도 있었지만 홍순명 선생은 자신의 자녀 6명을 모두 풀무농업학교에 보내며 그 학교를 지켰다. 그 홍순명 선생이 키워낸 학생들은 학교에서부터 한 신용협동조합을 지역에 세웠고, 학교에서 배운 대로 유기농을 하는 마을지도자들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유기농 쌀만 150만평을 심은 유기농의 메카가 된 것이다. 홍성은 유기농의 메카일 뿐만 아니라 피폐해져가는 농촌과는 전혀 다른 활기와 희망의 땅이다.

도법스님과 실상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불교귀농운동본부 등이 어우러져 지리산권에도 아름다운 희망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홍성권과 함께 아름다운 농촌공동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지리산권은 도법 스님을 비롯한 참여자들의 깨달음과 굳센 서원으로 인해 공동체 운동이 겪게 마련인 시행착오 없이 훨씬 단기간에 체계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일은 우루과이라운드와 한·미FTA 등으로 농촌사회가 급격히 붕괴되는 거대한 풍랑의 와중에서 진행됐다. 더구나 농촌을 살리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하는 원인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극복함으로써 상생과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는 생명평화결사로 펼쳐지고 있다. 이는 마을공동체운동을 통해 전 인도인을 깨워 아름다운 인도를 건설하려했던 간디의 이상을 좀 더 현실화하는 것이다.

간디는 그런 공동체운동을 통해 인류에게 비전을 보였다. 그러나 인도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간디 공동체는 이미 인도에서도 박물관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붓다의 버림 운동과 극락운동이 인도에서 결실을 맺지 못한 것과 같다.

따라서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운동이 우리 사회가 변화되어 공동체성을 회복시키려면 단지 이 운동이 실상사 일대나 인드라망생명공동체나 생명평화결사로서만 끝나선 안 된다.

전국의 모든 절과 모든 교회와 모든 성당과 모든 교당과 모든 관공서들이 공동체성 회복을 위해 공동체의 등불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나는 국내외의 많은 공동체를 돌아보면서 ‘인위적인 공동체’가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의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역시 이상은 이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대신 우리의 마을 공동체는 시대의 변화에 둔감하고, 새롭게 변화하지 못하고, 구습을 타파하지 못하는 단점도 있지만,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조상 대대로 공동체 성원들의 삶의 지혜가 녹아 있다. 그런 공동체 마을의 외형을 만드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내부에 휘감아 도는 공기를 만드는데 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따라서 어떤 인위적인 마을을 새로 조성하기보다는 급격히 붕괴되는 마을들이 유지되는 게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러나 이미 지난 30~40년 동안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많은 지역이 공장지역이나 도시로 변하거나 길이 뚫리고 터널이 뚫려 돌아갈래야 갈 고향이 없거나 이미 고답한 농촌의 풍경을 상실한 곳이 적지않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귀향 희망자가 고향이 아닌 타지로 갈 경우 마을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않아 농업을 익히는 것 외에도 이웃과 사이에서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는 경우도 적지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촌마을에서 노인들만 남게 되면서 마을에 정착하려는 젊은이들에 대한 경계심이 줄고,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마을들이 많고, 정착을 돕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정부와 관 차원에서도 농촌 정착에 대한 도움이 늘고 있다. 귀농을 위해선 어느 때보다 더 나은 여건이 조성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덴마크 등을 돌아보면서 사회안전망 등 눈에 보이는 그물망을 잘 갖춰놓은 그들이 개인화되면서 갖는 불안과 외로움과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절감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공동체를 열망했다. 그러나 공동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전통적인 공동체의 핵은 마을이나 지역 등 어떤 울타리나 형식이라기 보다는 ‘정’(情)이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각자가 별개지만, 자식이 아프면 나도 아프듯이 정이란 인드라망으로 이어진 공동체원들은 한마음이다.

어떤 사회안전망도 대신해줄 수 없는 우리의 정공동체를 지키는 노력을 할 수 있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한번 해체된 뒤에 인위적으로 되살리려는 것이 현실적으로 녹녹치 않음은 앞서 얘기한 바대로다. 그래서 공동체운동은 단지 구호로서가 아니라 내 개인의 행복과 인류의 지속과 행복을 결정짓는 것으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정으로 뭉쳐진 시골. 또 그들이 갖지 못한 조직력과 경쟁력으로 생산-소비자 연대 등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귀농자들. 이들이 내는 시너지 효과가 현재 농촌과 우리가 처한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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